인도기행
朴賢順(서강대 학생생활연구소 상담교수)
에베레스트 상공쯤 지날 때 일몰을 보았다. 물론 처음 지나는 길. 짙은 보랏빛부터 주황, 노랑, 붉은 빛깔의 노을, 해가 숨은 곳은 연한 계란 노른자 빛이었다. 아래는 어둔 회색의 운해. 그 운해의 끝과 노을이 만난 곳은 먹줄 마냥 선명했고 일몰은 순식간이었다. 모든 것의 끝점이 아마 그러하리라.(2월 13일)
델리에서 파트나까지는 ‘인도의 비행기’로 갔다. 곳곳의 봉쇄된 도로를 피해 이리저리 우회하며 해질녘에야 나란다대학 터에 이르렀다. 가는 길에 보았던 수많은 인간군상과 시궁창, 파리들 그리고 팔려고 늘어놓은 과자들. 모든 것이 한 40년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 듯 슬로우 비디오를 보는 것 같다. 누군가가 밖을 내다보며 저것은 인간이 아니라 벌레라며 슬프다고 했다. 나는 슬프지 않았다. 왠지 모든 삶의 무게는 같을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그들은 그냥 고단해 보일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단조롭게 펼쳐지는 도로변 풍경과 헐벗은 채 하릴없이 앉아있는 나른한 사람들, 끝없이 이어지는 짓다가 만, 혹은 헐다가 만 집, 손바닥을 꽉 찍어 쑥개떡처럼 둥글게 매만져 놓은 소똥을 붙인 벽돌집들 그리고 그 집들 너머로 석양을 받치고 있는 너른 강이 있었고, 강변에는 높은 굴뚝의 벽돌 공장과 일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강은 쉬지 않고 우리를 따라온다. 나도 나른해지면서 약간 몽롱해졌다. 졸린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닌 내 마음도 슬로우 비디오. 그렇게 몇 시간을 달렸다. 20여 만평에 달한다는 나란다대학 터는 일부만 발굴되어 있는 상태였고 전체적으로 낮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하늘을 향해 파헤쳐져 있었지만 지하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행중 한 사람은 그곳이 너무나 편안한 느낌을 준다고 했다. 수많은 육각형과 팔각형의 작은 구조물들이 있었고, 칸칸이 나뉜 방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끼 낀 탑 너머로 또 해가 지고 있었다. 잘 익은 홍시같은 해 그리고 넓고 푸른 들판. 그곳은 오래되고 미개하며 낯설지만 전부터 알고 있던 곳, 많은 지하자원을 묻고 있는 쓰레기 덮인 땅, 똥과 영혼들의 땅이었으며, 또한 너무나 큰 덩어리의 시간을 응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 시계 바늘은 멈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 번쯤 유학을 가보고 싶은 곳. 돌아오는 길은 기막힌 비포장. 하늘의 달과 별, 흙내음 섞인 밤바람, 머리에 혹 두 개, 그리고 라면. 기나긴 밤의 여로에서 누군가가 ‘덜컹거리는 버스 트렁크에서 김치통 뚜껑이 터져 가방들이 김치범벅이 된다. 버스가 계속 덜컹거리면서 드디어 트렁크 문짝이 열리고 가방이 하나씩 튀어 나가는’ 상상을 하자고 해서 그렇게 했다. 꿈같은 오늘 하루.(2월 14일)
실크와 시바신의 도시 바라나시. 바라나시, 시바, 실크. 부드럽고 매끄러우며 경쾌하고도 무거운 음들. 새벽 갠지즈의 일출을 보러 갔다. 갠지즈, 옆구리에 항아리를 끼고 있는 강가. 그녀는 아침 일찍부터 품으로 되돌아오는 자식을 맞으면서 그 넉넉한 물로 사람들의 옷과 몸과 영혼을 씻어주고 있었다. 거기에도 똥누는 사람이 있었다. 짙은 초록빛 갠지즈 물은 우유보다 더 진하고 걸쭉했다. 부드러운 녹색 미음인가. 강가에는 온갖 것들이 있었다. 폐허의 잔재와 같은 건물들, 여인숙, 수많은 제단, 향을 피우고 절하는 사람, 떠오르는 해를 보며 명상에 잠긴 사람, 유치한 차양을 쳐놓은 제단들의 퍼레이드, 시꺼멓게 때 낀 손으로 바치는 노란 꽃 목걸이, 성수를 머리에 부으며 경을 외는 노인, 멱감는 소년, 빨래하는 남자, 머리 감는 여인, 귀족의 별장 같은 집, 땟국 절은 담요를 둘둘 말고 뒹구는 걸인들과 견고한 무슬림 성, 화장터 뒤의 엄청난 장작더미, 차례를 기다리는 시신. 그 어느 것 하나 일매진 것이 없다. 어쩌면 이렇게 잡다할 수가 있나. 내 눈은 또 얼마나 획일화된 것에 익숙해져 있었나. 그 사이 해가 뜨고 있었다.
통통배가 유턴하는 순간 망망한 물결 위로 뱃머리에 앉은 사공의 실루엣이 깔끔하게 눈에 들어온다. 사람이 저렇게 작게 웅크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는 거의 완벽하게 몸을 접은 채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등 너머 낮고 깊게 흐르는 강물 위에서 가장 작은 몸짓으로 앉아 떠오르는 태양을 눈에 담고 있는 그는 강물과 태양 사이에 있는 작은 인간을 보여주었다. 배가 방향을 바꾸자 강 건너편이 보인다. 저를 두고 피안이라 하던가. 사람 흔적이 없다. 뽀얀 물안개 너머 새벽빛을 머금은 푸른 회색의 나무들과 아련한 수풀, 허옇게 드러난 모래둔덕이 정적을 들려준다. 거기는 고요의 땅, 소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냥 그렇게 담담히 있는 것들 사이에서 시간은 제 갈 길을 잃어버릴 테고…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갠지즈는 이승과 피안을 양 겨드랑이에 끼고 조용히 누워 있었다. 그 위로 떠오르는 태양. 초록 물빛깔 때문이었을까? 갠지즈에 빠진 해는 누런 황금빛이다. 하늘의 해와 물 속에 비친 해그림자는 대형 i 자를 만든다. 황금 i. 그런데 내 마음은 왜 이리 담담한가. 감동할 준비를 하고 왔는데도 말이다.
다시 숙소에 들려 아침식사를 하고 Maha Bodhi 사원으로 길을 떠났다. 늘 그렇듯이 가고 오는 길은 협소함과 남루함, 그런 가운데 서있는 제법 기품있는 나무들, 다듬어지지 않은 것들, 사람과 자전거와 릭샤와 택시와 짐차와 버스와 개와 소가 인도 차도 할 것 없이 뒤범벅이다. 그래도 제각각 거칠 것 없이 갈 길을 간다. 이것도 무애?
보디가야의 대탑 – 그것은 장엄. 그 뿐이다. 거기서 나는 여태껏 본 것 중에서 제일 큰 정신을 보았고 진짜 감동했다. 나의 인도여행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위대한 인간 정신의 모상. 수수하고 견고한 탑의 장엄한 모습 속에는 어느 하나 가릴 것 없이 아름다움을 갖춘 작은 조각들이 수도 없이 들어있다. 수십 수백의 불상들, 탑 모서리, 울타리의 문양 하나하나, 그 어느 것이라도 좋았다. 한 나절 바라보고 앉아 있어도 흡족했으련만 금강불 이마에 박힌 금강석을 끝으로 아쉽게 떠나야 했다. 티벳승들의 경읽는 소리는 뱃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소리- 그것은 음성이 아니라 그로테스크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음향이었다. 이제 그만.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2월 15일)
버스로의 night journey 17시간 뒤 아그라에 도착. 녹야원 터와 박물관. 책에서 보았던 아쇼카 왕의 석주 머리부분과 커다란 수레바퀴 umbrella가 인상적이었다. 붉은 갈색의 대리석 사자 석상. 저 단단한 돌로부터 구불구불한 사자 갈기 하나하나를 살아있는 털처럼 쪼던 석공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아마 그 털을 날리는 바람뿐이었을 것이다. 가이드 하리쉬는 힌두신상들이 모셔진 쪽으로 가자 신바람 나서 설명한다. 슬그머니 다가와 합세하는 노인. 박물관을 나서는 내게 노인이 슬그머니 손을 내밀었다. 정중한 박물관 기분이 싹 가시면서 당황하는 나를 하리쉬가 데리고 나갔다. 박물관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본 작품은 나였다.(2월 16일)
Taj Mahal.
여기에는 타지마할을 그린 그림이나 한 컷 붙이고 싶다. 그런 다음 그냥 바라보면 될 것 같다.
샤자한에게 있어서 그의 비는 무엇이었을까?
밝은 대낮. 타지마할 측면에 있는 사원 앞마당에 앉아 정면이나 다름없는 무덤의 측면을 바라보며 아무도 없는 달밤을 상상해 보았다. 낮처럼 환할 것이다. 달빛 받아 빛나는 타지마할은 제 몸으로 그 뜰을 밝히면서 잠든 나무의 정령들과 그 무덤 궁궐에 서린 영혼들을 일깨울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주인공이 등장하면서 무도회가 열린다. 산 사람이 보면 안 되는 무도회.
타지마할은 완전한 대칭을 이룬다고 했다. 실제로 그랬다. 대칭이든 무엇이든 간에 인간의 소산 중 완전에 가까운 것이 얼마나 될까? 타지마할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샤자한의 마음속에 있는 가장 아름다고 애틋하며 소중한 것, 세속을 초월하는 그 어떤 것이 표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사랑과 슬픔과 그리움이었을 것 같다. 갑자기 그가 보고 싶어졌다. 아울러 그가 사랑했던 여인도 함께. 타지마할 꼭대기에 얹힌 둥근 돔은 샤자한의 굵은 눈물 방울.
그가 살던 궁궐은 무굴제왕의 궁궐다웠다. 철벽같은 성곽과 그 성을 에워싸고 흐르는 작은 냇물과 맹수의 숲, 단단하게 각 진 건축물과 그 견고함을 중화시키는 둥근 곡선의 문틀, 창틀, 환상적인 문양들. 누가 이 성을 넘볼 수 있으랴. 호화로운 무덤궁궐을 짓느라 백성들을 고단하게 했던 그는 오늘날까지 그것으로 후손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 정복자로서의 삶과 아내에 대한 사랑과 슬픔, 오만의 손목을 자른 무자비한 열정이 화려하고 정교한 솜씨 속에 어우러져 있는 타지마할. 그러나 거기서 온후함과 질박함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백성들의 몫이 아니었을까 싶다. 성을 나오는 내리막길에서 나도 모르게 ‘사나이로 태어나서… ’하는 노래가 나왔다. 제 흥에 겨워 ‘샤자한이 멋있다’고 하자 곁에 계시던 정 교수님께서 ‘그러니 죽는 것이 얼마나 싫었겠느냐’고 하셨다. 그래. 삶은 공평한 거다. 그런데 난 왜 이리 배가 아픈가? (2월 17일)
(이 글은 2000년도 한국융연구원 소식지 ‘길’ 제1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