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세계로의 여행
이광자
분석시간에 가져간 꿈을 조용히 읽고 있는데, 갑자기 이부영 선생님께서 “이게 꿈이냐!”라고 나지막하게 혼잣말처럼 하시며 좋아하시는 것 같아 어리둥절한 나는 “지금 읽고 있는 꿈이 진짜 꿈입니까?”라고 어리석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게 아니라며 그냥 계속 읽으라고 하셨으나 무엇 때문인지 몹시 궁금했습니다. 차근차근 꿈에 대해 분석을 해 나가는 도중에 선생님께서 부탁을 하나 해야겠다고 하셨습니다. ‘융과 나’에 대해 쓸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한번 써 보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헤매고 있고 융에 대해 아는 바도 없는데 어떻게 제가?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꿈에서 ‘지금’ 구상을 하고 있지 않느냐! 그리고 그런 부분을 솔직히 써보면 좋은 글이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부탁을 받는 순간 ‘올 것이 왔구나!’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 날 아침, ‘만일 내가 이 꿈에서처럼 나의 분석심리학 공부과정을 써 본다면 어떨까?’라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남들 앞에 나를 드러내는 것이 우선 겁이 나고 무식이 탄로 날까봐도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지금 길을 걸으며 ‘융과 나’를 계속 읊조리며 나와 분석심리학에 대한 한 조각 작품을 위한 회상을 시작했습니다.
17년 전의 일입니다. 융과 나와의 만남의 계기는 ’85년 의대 본과 4학년 정신과 이부영 교수님께 4주간의 elective course를 돌 때였습니다. 교수님으로부터 융의 분석심리학적 이론을 배우고 연상검사도 시험삼아 해보고 소논문도 써 내야했습니다. 의대생활에 항상 뭔가에 목 말라하던 나는 융의 인간 심성에 대한 논리적 사고를 접하면서 그것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습니다. 당시 ‘이는 인간의 심성을 이해하는데 너무나 큰 도움이 되겠구나. 이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면 참 좋겠다.’라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매우 흥미롭고 신비하게 생각하면서 읽었던 Hesse의 데미안이 생각나면서, 그것을 분석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그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분석심리학 관점에서 본 데미안’이라는 비슷한 제목으로 어느 도서관에 앉아 흥분과 몰입 속에서 그 논문을 썼던 기억이 생생하게 내 가슴속에 남아있습니다. 그 후 정신과를 지망했고 저의 분석심리학을 좀더 깊이 배워보고 싶어하는 뜨거운 열망에 ’88년 3월말 정신과 전공의 2년차 초기에 정신과 교수님들께 죄송 한 마음과 정신과 동기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안고 유학 길에 올랐습니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때가 마치 알에서 갓 깨어난 새끼거북이 한 마리가 본능적으로 자기가 살 곳을 찾아가듯, 모든 것을 운명을 맡긴 채, 자신의 본향인 먼바다를 향해 험난한 모래밭길을 홀로 열심히 기어가야만 하는 모습으로 떠오릅니다. 독일로 향한 나의 발걸음은 부족한 나를 채우기 위한 무의식의 발로였고, 그 속에는 순진한 아이들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들어있었습니다. ’88년, 한국은 서울에서의 올림픽경기로 인해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해였습니다. 내가 독일로 가져간 것은 꿈과 희망과 열정이라는 자산이었습니다. 왜 독일에 왔느냐라는 그들의 수 없는 질문에 융의 분석심리학을 공부하러 왔다고 수없이 대답하면서 뜻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길을 찾았습니다. 융 공부의 전초전은 Wuerzburg 대학에서의 어학 코스와 심리학 공부였습니다. 갈 길이 멀고 원하던 바와는 다르다는 생각에 심리학공부를 접고 ’90년 융 연구소가 있는 베를린으로 향했습니다. 그 해는 바로 베를린의 동서장벽이 무너지고 동독 속에 홀로 고립되었던 서베를린이 이제는 동서가 하나되어 통독의 수도로서의 옛날위상을 찾기 시작하는 떠들썩한 역사적인 해였습니다. ’90년 3월 드디어 융 연구소에 문을 두드렸습니다. 두 차례에 걸쳐 남자, 여자 융 교육분석가선생님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물론 실패였습니다. 강의만이라도 듣고 싶다는 생각에 그들에게 청강생으로서 그 해 10월부터 시작되는 학기부터 1년간 예비과정의 강의를 들을 수 있게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때를 기다리며 의과대학에서 정신치료에 대해 공부를 하고 그것에 대한 논문을 쓸 수 없을까 하고 알아보니 독일에서는 정신과와 정신신체학이 확연히 구분되어있었고 병동도 따로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정신분석가이신 교수님들, 정신분석 교육과정에 있는 의사와 심리학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에게도 분석심리학보다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에의 접근이 더 용이하고, 동양적이고 신비적인 요소가 있는 융의 분석심리학은 합리적인 그들에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기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베를린 자유대학 의과대학 정신신체학 및 정신치료 병동의 B. F. Klapp 지도교수님 밑에서 박사과정을 밟게 되면서 다시 병원에 몸을 담아 앞서가는 그들의 것을 배우고 느꼈습니다.
’90년 10월, 흥분된 마음으로 저녁 6시경 융을 배우기 위해 베를린 정신치료 연구소의 조용한 강의실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 아늑함과 기쁨은 참으로 좋았습니다. 융 기본강좌의 첫 시간에 Dr. Wilke 선생님께서 빨간 장미 한 송이를 들고 들어오셨고, 수업이 끝나고 그것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그 장미를 받아들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환영의 의미였습니다. 베를린 정신치료연구소의 특징은 프로이드학파와 융 학파가 같은 공간에서 공존을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나는 1년간 강의를 들으며 정신분석학과 분석심리학의 기초적 이론을 배워나갔습니다. 비교해 보면 정신분석학보다 융의 이론은 너무나 광범위하고 이론적으로 따라가기가 어려운 부분이 너무 많았습니다. ’91년 봄, 융 분석가교육과정에 재도전하면서 Dr. Wilke와 여의사 Dr. Beyland 선생님께 두 차례의 인터뷰를 했습니다. 결과는 실패였으나 융 교육분석가모임에서 저에게 일년간의 예비과정 수업을 더 받을 자격과 위 두 분의 분석가 선생님들께 면담을 통해 나에게 맞는 길을 찾을 기회를 주었습니다. 저는 Dr. Wilke 선생님께 면담을 신청했고 그 분은 저에게 분석을 받을 기회를 제공해주셨습니다. ‘91년 겨울, 나의 분석경험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3번씩 분석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일주일에 두번씩, 그러다가 한번씩으로 총 250시간이라는 집중적인 분석경험이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분석이 시작되자, 전에는 알지 못했던 그 수많은 무의식의 세계가 신비하게 나타나기 시작했고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서서히 융이 말한 것이 신기하게 맞는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 의사로서 환자를 잘 보기 위해 단지 지식적으로 배운다고 자신만만하게 생각했던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나를 보는 것이었고 내 무의식을 봐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혼돈스러움과 무의식에 대한 혼란으로 초기에는 분석을 받은 그 날은 정신적 에너지의 고갈을 느껴야 했습니다. 항상 알 수 없는 무의식에 무력감을 느끼기도 하고, 다만 지식으로 쉽게 무장해 좀 잘 난 척 하고 싶었던 그런 모든 것이 철저히 깨져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독일로 온 목적이라고 생각했던 그런 허상이 산산이 조각 나 버리는 것을 느끼며 계속 방황을 했습니다. 그러한 과정 중에도 당시 나의 여건에서는 어려울 수밖에 없었던 융 분석가교육과정에 대한 여운과 재도전, 갈등은 지속되었습니다. 식지 않는 나의 도전과 실망하는 나의 모습이 안타까워서인지 Dr. Wilke 선생님께서 Freud와 Jung의 초창기시절 이야기를 해 주시고, 결국에는 자신의 개인 분석경험과 이론을 잘 알맞게 변환시켜야 함의 중요성과 환자와 의사간의 Feedback의 중요성 등을 강조하시며 융이 말한 무의식을 나의 상황에 맞게 배우는 방법을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서서히 제 입장을 받아들이고, 주어진 상황에 감사하며 우선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동안의 개인분석경험은 나에게 너무나 귀중한 것이 되어버렸고, 융의 이론을 공부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나의 무의식의 세계에 놀라고 신기해하고 또 두려워하고 황홀해하면서 나는 나의 무의식을 따라 춤을 추었던 시기였습니다.
또 하나 나에게 소중한 것을 일깨워 주었던 계기는 융학파의 수업 중에 주역에 관한 세미나였습니다. 그들이 어린아이처럼 동전 3 개를 던지며 진지하게 주역을 알아 가는 모습에서 신기하게도 그들을 통해 동양의 순수성을 엿보았던 것입니다. 즉시 독일인 Richard Wilhelm이 중국에서 주역을 독일어로 번역했다는 책을 사들고 주역의 참뜻을 이해하려고 시도해 보았고, 그와 더불어 노자 장자에도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독일 인도학자 Heinrich Zimmer가 자신의 미국에서의 이민생활에서 그에게 외국어로서 영어는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하고, 다른 방식으로 다시 한번 인간이게 하는 자극제라고 표현한 말에 공감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언어로 분석가가 되려고 무던히 애를 썼던 나로서는 독일어는 내가 제일 먼저 뛰어 넘어야 했던 장벽이었던 것입니다. 7년간의 유학생활은 처음에 그들에게 이질적으로 느껴졌던 많은 부분들이 그들과 가까워지면서 그 다양성 중에 인간 심성의 동질성을 느끼게 했고 동시에 융이 경고한 세상의 가장 무서운 것은 우리들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있다고 한 말에도 분석경험을 통해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94년 12월 Dr. Wilke와의 마지막 분석시간, 나는 준비해간 하회탈을 작별 선물로 드리고, 선생님께서는 독일에서 모은 경험의 돌들을 한국에 돌아가 건축용 재료로 삼으라고 부탁하시면서, 선생님께서 20년간 키워온 벤자민의 가지로 분재해 키워주신 화분을 작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러 곳에서 모았다는 갖가지 돌을 담은 바구니를 보이시며 갖고 싶은 돌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그 곳에 놓인 장갑 등으로 미루어 보아 그것을 갈고 닦으시기도 하시나 봅니다. 밝은 붉고 노란 갈색 빛이 나는 약간 반짝이면서 투명해 보이고 가장 거칠어 보이는 돌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옆에 있던 그 보다 작은 똑같은 돌 하나를 더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돌은 당시 부딪혀 깨어져야 할 부분이 너무나 많고 열심히 갈고 닦아야 할 내 마음의 돌이었나 봅니다. 그 돌을 화분의 흙 위에 얹고 화분을 소중히 끌어안고 마지막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감회가 밀려오면서 크리스마스 분위기의 베를린거리에는 갑자기 첫 눈이 휘날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의 기다림과 소망, 시도와 실패, 실망과 좌절, 아쉬움, 그러나 나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 했다는 생각과 뿌듯함, 배운다는 아름다움 속에서의 귀중한 경험을 안고 길을 걸었습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무작정 융을 공부하려 왔다고 불쑥 찾아온 저를 3년이라는 긴 시간 속에서 항상 그 자리에서 반갑게 맞아 주시고, 조심스럽게 인내와 관용으로 저에게 귀를 기울이며 도와주신 Dr. Wilke 선생님께 항상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드립니다. 어려운 독일생활에서의 버팀목이었고 울타리였습니다. 고통 뒤에는 내면에서의 잔잔한 기쁨과 감사함이 생기나 봅니다. 이로서 독일에서의 저의 용감했던 무의식세계로의 여행은 서서히 저를 한국으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또 한국에서의 7년이 지난 지금, 융과 나라는 글을 쓰면서 융이 나에게 가져다 준 것들을 되돌아보며 그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이제 이 글을 부탁 받을 당시 저에게 떠 오른 처음 생각을 적어 볼까 합니다.
정신과 의사로서 분석을 받는다는 것, 또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꿈에 나타난 무의식을 치료자 앞에 벌거벗은 기분으로 내 놓는다는 것은 항상 어려운 일 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가지는 질병에도 우리는 두려워 하지만, 우리의 정신이 내 놓는 것에는 우리는 두려움과 동시에 수치심을 갖게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엄청난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이 연장되었지만, 결국 우리의 육체는 나이 들어 병들어 죽게되면 땅으로 묻혀 버릴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과 영혼에 대해서는 우리는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 정신과 의사가 다루어야 하는 정신은 너무나 무모한 것입니다. 잡으려는 순간 사라져 버리는 생각과 알 수 없는 무의식을 보려는 우리의 작업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꿈이 바로 우리 작업의 한가지 도구 즉 화두인 것입니다. 끊임없이 그것을 잡고, 때론 감탄하고 때론 놀라 도망치고 발버둥치면, 내가 보지 않으려고 하는 부분과 내가 볼 수 없는 부분을 꿈이 우리에게 거울처럼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나를 위해서, 성숙, 발전, 조화, 행복을 위하여. 주역의 64괘가 끊임없이 돌아가듯 우리의 꿈도 그러한 것 같습니다. 무의식과 현실, 결국 두 가지 모두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꿈은 우리를 깨달음으로 인도하려고 무난히도 노력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나 자신을 알아가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환자의 환청, 환시, 부셔지는 고통을 공감할 수 없으면서도 그들을 치료하고 지켜봐야 하는 것이 우리 정신과 의사입니다. 뭔가를 일구어내기 위한 chaos속의 질서를 기대하며 엄청난 무의식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며 헤매야 할 때, 그것의 길잡이가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분석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알려는 열망과 공감해 보려고 하는 노력은 우리 정신과 의사의 기본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정신을 알아야 환자의 정신도 조금은 이해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정신과 의사라는 다양한 가면 뒤에 숨어서 우리는 환자의 것만을 보면서 내 것을 보기를 게을리 하고 피한다면 그것은 위선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에 대해 무지한 만큼 환자를 보는 데 있어서도 무지 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내가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깨닫게 해주고 우리의 길잡이 역할을 해 주는 것이 바로 스위스 정신과 의사, 심혼의 의사(Seelenarzt)였던 융이었고 그래서 융과 나와의 만남은 매우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융과의 인연으로 맺어진 독일과 한국의 모든 이들에게 분투와 개인적 발전과 성숙, 인내하는 행복한 삶을 기원합니다. 나를 표현 할 수 있게 격려해주시고 기회를 주신 이부영 교수님께 감사 드립니다.
(이 글은 2002년도 한국융연구원 소식지 ‘길’지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