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미 : 치료자의 질병과 죽음에 대한 생각들

치료자의 질병과 죽음에 대한 생각들

이나미(이나미 심리분석연구소)

치료자가 아프면 다양한 전이현상이 생긴다. 버려지는 것 같고, 날 배신하는 것 같고, 그동안 갖고 있던 투사나 이상화가 걷어지기도 한다. 때론 불안과 공포, 분노의 감정도 생기지만 우울감과 치료자의 질병에 대해 아예 무시하고 부정해버리는 수도 있다. 치료자에게 공감을 해주기도 하지만, 피분석자 자신의 문제 때문에 공감 능력을 보여주지 못할 수도 있다. 결국에는 분석가가 심각하게 아파서 분석을 하지 못 할 경우엔 그동안 쌓였던 애착관계가 서서히 엷어진다. 때론 분리불안을 겪기도 하고, 치료자와 동일시하거나 지나친 연대의식이 생겨서 같이 무언가를 해결하려고 하기도 한다. 아픈 치료자를 배려해주고 위로하는 면도 보인다.
역전이 현상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피로하고 활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피분석가에게 향한 관심이 옅어지고 때론 무관심하거나 감정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에너지 부족으로 고립된 사회관계를 지속하거나 우울증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질병 때문에 환자를 보는 눈이 더욱 따뜻해지거나 융통성 있게 변할 수도 있다. 자신의 신체 변화에 따른 감정 변화를 자세히 관찰하면 무의식을 이해하는데 훨씬 더 큰 도움을 받아 또 하나의 개성화과정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융의 임사체험

융은 심장 발작을 일으키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마음 상태를 기록한다.
“나는 마치 우주 공간의 아주 높은 곳에 있는 것 같았다. 아득히 밑에 지구가 멋진 푸른 빛 속에서 떠올라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심청색의 바다와 대륙을 보았다…. 수없이 많은 작은 벽감의 움푹 파인 곳에 야자 기름이 채워져 있고 작은 촛불이 타고 있었는데 그것들이 밝은 불꽃의 관으로 문을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객관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내가 살아온 그 모든 것이었다. 처음에는 파괴되고 빼앗기거나 강탈되었다는 느낌이 지배적이기는 했으나 갑자기 그것도 사소한 것이 되고 말았다. 모든 것이 지나간 듯 했다. 이제까지 있어온 것에 거꾸로 연관됨이 없이 하나의 기정사실이 남아 있었다. 사원에 가까이 가면서… 어떤 역사적 관련에 나, 또는 나의 생이 속했는지를 이해하리라 믿었다. 나는 무엇이 내 앞에 있었고 왜 내가 되었으며 그리고 어디로 내 생이 계속 흘러갈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온 생은 마치 시작도 끝도 없는 하나의 역사처럼 내게 보였다. 나는 하나의 역사적 단편, 앞서거나 뒤따르는 문구가 결여된 단면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째서 그것이 그러한 경과를 취하게 되었을까? 왜 내가 이런 특수한 전제들을 가져왔는가? 나는 그것으로 무엇을 만들었는가? 무엇이 그 결과로 일어난 것인가?… 그곳에서 나는 모든 것이 왜 그렇게 되었고 달리 되지 않았는가를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를 치료했던 의사, 그의 태고적 모습, Kos의 왕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생전에 그는 이 왕의 화신, 아득한 옛 부터 존재하였던 원초적 상의 시대의 화신이었다…나는 지구를 떠나서는 안 되며 되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매우 실망했다. 이제 모든 것은 소용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탈피의 고통스런 과정은 쓸모없게 되었고, 나는 저 사원 속으로 나에게 속하는 사람들에게 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다시 저 상자곽-체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주의 수평 뒤에 삼차원의 한 세계가 인공적으로 세워진 듯 했던 것이다. 그 속에 모든 사람이 작은 상자 속에 혼자 앉아 있는 듯 보였다. 그리고 이제 나는 다시 그것이 뜻있는 일이라고 상상해야 했다! 인생과 모든 세계가 나에게는 마치 감옥처럼 보였고 나는 다시 건강을 회복하리라는 사실에 끝없이 화를 내고 있었다… 나는 내 의사에게 저항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그가 나를 다시 삶으로 되돌려 놓았기 때문이다. 한편 나는 그를 염려했다. 그가 내게 태고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던가!.. 그는 이제 죽을 때가 되었다는 말이다.”

언뜻 그저 기이한 경험인 듯 들릴지 모르겠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의 질병을 통해 우리 인간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고, 크게는 우주와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경험한 것으로 들린다. 죽을 만큼 아프지 않으면 어떻게 자신의 몸을 떠나 우주를 유영하는 그 신비한 체험이 가능하겠는가?

융의 변환 체험

융은 고통을 통해 새로운 창조적 과정을 경험하는 것, 즉 이런 변환 체험이 마치 나무나 식물을 키우는 것 같다고 말했다. 꽃이 피고 과일이 열리려면 공기와 습기와 흙과 햇빛이 모두 오케스트라처럼 조화를 이뤄야 한다. 단단한 바위가 부서져 부드러운 흙으로 변해 꽃과 나무를 품으려면 오랜 시간 뜨거운 해와 추운 겨울, 홍수와 가뭄을 견뎌야 한다. 융은 자서전에서 “나는 인생이 자신의 뿌리를 통해서 살아가는 식물과 같다고 생각해왔다. 식물 고유의 삶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뿌리에 숨어 있다. 땅 위에서 보이는 것은 오직 여름 동안만 지탱한다. 그리고는 말라버린다. 하루살이 같은 현상이다… 그러나 나는 영원한 변환 속에서도 살아서 지속되는 어떤 것이 있다는 느낌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우리가 보는 것은 꽃이다. 꽃은 사라진다. 그러나 뿌리는 계속된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 같이 완벽하고 안온하고 즐거운 시간과 공간에 머물려고 하는 사람에겐 고통을 겪은 자만이 아는 인간으로서의 존엄한 자유 의지가 없다. 철학자의 돌은 그저 굴러다니는 하찮은 돌이기도 하지만, 오랜 시간 고통을 견딘 기억을 품은 인내의 돌이기도 하다.
심장병을 앓고 난 후, 본격적으로 노년의 시기에 들어선 융은 또 다음과 같이 노자를 인용한다. “노자가 모든 사람들이 분명한데 다만 나만이 우매하구나 했다면, 그것이 바로 내가 지금의 고령에 느끼고 있는 것이다. 노자는 높은 통찰을 지닌 사람의 본보기였다. 그는 가치와 무가치를 보았고 이를 겪었으며 인생의 마지막에 그 자신의 고유한 존재로, 그 인식할 수 없는 영원한 의미 속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인생을 충분히 겪은 노인의 원형은 영원히 진실이다. 노년이란 하나의 제약이다. 그럼에도 나를 충족해 주는 것이 많다. 식물, 동물, 구름, 낮과 밤, 그리고 인간 속에 영원한 것— 나에 관해 불확실해지면 질수록 온갖 사물과의 친밀감이 더욱 커진다. 그토록 오래 유리했던 저 낯설음이 나의 내면세계로 옮겨와 내 자신과의 예기치 않은 생소함을 내게 현시한 것처럼 생각된다.” 융이 심장병을 앓으면서 겪었던 임사체험과 죽음 앞에 한발 한발 다가서면서 기록해 놓은 생각들은 우리가 질병과 고통 앞에 어떤 태도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매우 중요한 단서를 준다.

Freud의 고통과 죽음

같은 정신과 의사지만, 보다 현실적이고 인간의 성적 발달과 개인적 외상 경험에 집중했던 프로이트에게 노화와 죽음은 신비한 우주적 체험으로의 관문이라기보다는 고통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어쩌면,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프로이트와 같은 고백이 훨씬 더 피부에 닿을지도 모른다. 프로이트는 마리 보나파르트에게 자신이 마치 무심한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작은 섬처럼 무언가 계속 먹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도 희망을 놓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의 의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의사에 대한 불만도 털어 놓는다. 또 괴테의 시를 뒤틀어 반쯤 가라앉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자신의 처지를 비유하고, 발자크의 소설, 죽어가는 피부(La Peau de chagrin)를 마지막까지 읽으면서 위로를 받는다.

노자가 본 죽음, 선비가 본 죽음

그렇다면 삶과 죽음에 가장 초연했던 도덕경은 죽음에 대해 또 달리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도덕경 33장은 다음처럼 결론짓는다.

제 자리를 잃지 않는 이는 오래 가고
(육신이) 죽더라도 (도를) 잃지 않는다면 그것이 진정한 장수이다
不失其所者久, 死而不亡者壽

죽음을 보는 노자의 사상은 철저히 현실주의적인 조선시대 선비들에게도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보자.

곡유주부(哭劉主簿)

玄川 원중거 (영․정조 시대 학자)

인생은 한 번 피는 꽃
천지는 큰 나무다.
잠깐 피었다 도로 떨어지나니
억울할 것도 겁날 것도 없다

人世一番化
乾坤是大樹
乍開還乍零
無寃亦無懼

노자와, 융과, 원중거의 생각이 어떻게 이리 비슷할 수 있는가?

철학과 종교가 보는 죽음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들도 태어나 죽게 되는 인생이라는 제한된 시간에 대해 깊이 고찰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은 운동에 있어서의 어떤 것, 즉 운동에서 헤아려지는 것.”이라 했다. 우리가 살아 눈꺼풀이라도 움직이는 한, 시간을 의식하고, 시간을 의식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유한성을 의식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을 영혼(anima)과 연결시킨다. “영원에 있어서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이 모두가 현재다. 영원은 과거도 미래도 없이 정지해 있으면서 과거 시간과 미래 시간을 지시한다. 당신의 세월은 단 하루이니 나날이 아니요 오직 오늘이다. 당신의 오늘은 (곧) 영원이다.” 13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 보에시우스(Boetius)는 “운명의 질서는 인간의 행동과 운을 인과의 끊을 수 없는 연쇄로 묶는다. 이 원인이나 결과나 다 불변적 섭리에서 유래하는 것이다…영원이란 끝없는 생명의 온전한 충만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소유하며,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란 아무 것도 없고 과거로 흘러 사라지는 것 또한 아무 것도 없는 것을 가리킨다. ”고 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보에시우스 역시 시간 앞에 노자와 아주 유사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존재와 시간”으로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진 하이데거는 “그 자체로 공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 절대적 공간은 없다. 공간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물체와 에너지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시간 또한 아무것도 아니다. 시간은 오직 그 속에서 발생하는 시간으로 인해 성립한다. 절대적 시간은 없고 절대적 동시성도 없다…현존재는 자기의 존재 가운데 있는 존재자, 즉 우리가 인간의 삶이라고 알고 있는 그 존재자로서 세계 내 존재, 타자와 함께 있는 존재를 가리킨다. 그리고 그 현존재의 존재는 다름 아닌 마음씀(Sorge) 이고, 그 마음씀의 의미가 시간성이다. 그리하여 이 시간의 ‘개념’이 존재와 시간의 원형이다.”
우리의 정신이 깨어 있으므로 시간을 의식하게 되고, 시간을 의식하면 다시 죽음을 의식한다. 죽음을 의식하는 순간, 현실에 묻혀 잠자던 우리의 의식은 다시 깨어나게 된다. 불교에서는 어떻게 보았을까? 설일체유뷰의 구사론(設一切有部 俱舍論)과 경량부(經量部)의 시간관을 보자.
설일체유부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가 실재적으로 있는 고로 생성 소멸하여 변화하는 객관세계도 이 삼세에 걸쳐 항상 실재한다는 것이다. 근과 업의 결과로 과보가 있다.”라고 말했고, 경량부는 “과거는 이미 사물로서든 의식으로서든 현재 속에 없으며 미래는 아직 현재 속에 있지 않으니 미래와 과거는 실재할 수 없다. 지금은 없지만 일찍이 있었던 것(曾有)과 지금은 없지만 마땅히 있게 될 것(當有), 법체가 삼세에 걸쳐 상속적으로 있다. 시간에는 별도의 실체가 없고 현상에 의존해서 비로소 있게 된다는 것(有部)”이다. 역시 하이데거의 생각과 유사하다.
유식론도 항시현재론을 주장한다. “현재는 한 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다. 순간마다 새로 나고 그와 함께 뒤로는 소멸한다. 인과를 결정하는 것은 제 8식인 아라야식이다. 아라야란 유정 근본의 심식으로서 그 사람이 애용하는 일체의 사물을 감아쥐고 놓지 않는다. 즉 일체 사물의 종자를 감추어 갖고 있는 것이다. 이 종자가 밖으로부터 오는 연에 따라 현기하는 것이 연기이다. 아라야식은 단절하지도 않고 항상 있는 것도 아닌, 항전하는 것이다. 끊어지는 것도 아니고 항상 있는 것도 아니다.

꽃과 같은 내 인생

폰 프란쯔는 “On Dreams and Death”에서 꿈, 즉 무의식의 한 현현이 죽음을 준비시켜 준다고 했다. 질병과 죽음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성숙시킨다. 자아의식이 바른 태도를 갖기만 한다면 우리는 탄생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영혼의 고갱이, 즉 자기를 끊임없이 체험하게 될 것이다. 내면의 전체성을 찾는 작업이다. 그러나 폰 프란Wm는 인생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는 죽음을 앞둔 노인들이 오히려 이기적인 어린아이처럼 변할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신체질병을 겪을 때 그러한 자아중심적인 면, 자신의 그림자를 직면해야 보다 온전한 전체 체험이 가능하다고 했다.
분석을 시작하기 훨씬 전, 돌아가신 할머니와 함께 꽃이 아름답게 핀 동산에서 놀던 꿈을 꾸었던 순간이 아직 생생하다. 아롱다롱 고운 꽃들과 낮은 키의 부드러운 관목들 안에서 하얀 옷을 입은 할머니의 모습은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놀다보니 큰 강물이 나왔다. 아직 젊고 겁이 많은 나는 할머니를 따라 가면 안 될 것 같아 슬그머니 할머니 손을 놓치고 말았지만 아쉽고 서운한 마음에 오랫동안 할머니를 찾았다.
언젠가 저 세상으로 가기 전 내 인생을 문득 돌아보면서, 닥칠 때는 지옥이었던 순간들이 사실은 꽃동산이었음을 절감할지도 모른다. 꽃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우리가 만난 그 많은 행복하고 불행한 인연들도 사실은 꼭 일어나야 할 필연이 아니었을까. 다만, 내가 꽃이 왜 피고 지는지, 왜 내가 그 꽃을 지금 이 순간 만나고 있는지 그 의미를 모를 뿐.

 

1)  회상, 꿈, 그리고 사상 p 330-334

2)  Berthelot, Collection des anciens alchimistes grecs IV I 12 in CW. 13 Alchemical Studies, p274 the Philosophical tree

3)  노자와 융 p319

4)  Berthelot, La Chimie au moyen age III p 67, CW 13 p278

5)  회상, 꿈, 그리고 사상 p405

6)  Schur, Max Freud : Living and Dying pp527-9

7)  노자와 융 p311

8)  Aristotle Physica 219 b 1-2

9)  Augustinus Confessions Nk XI Ch. X

10)  Ancius Manlius Severius Boetius (480-534) De Consolatione Philosophiae 정의채 역 철학의 위안 성바오로 출판사 231 쪽 287 쪽

11)  소광섭 시간의 철학적 성찰 문예출판사 555-556 쪽

12)  아비달마구사론 : 소승불교 교리의 대성서인 대비 바사론의 강요서 세친 보살의 저작, 현장 번역 법상종의 교학서

13)  인도 부파 불교 중 설일체유부에서 분파. 기원후 1세기경 슈릴라타 , 법은 현재에만 존재하고 과거 미래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부처럼 마음과 심리현상을 구별하지 않고, 마음이 시간적으로 전후해 심리현상이 일어난다. 심부상응행법 생, 주, 이, 멸 등 마음에 관계없이 존재하고 어떤 종류의 힘을 가지는 제법의 실유를 부정하고, 원소와 무표색, 물질, 무위법도 실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14)  ibid p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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